ଘ(੭*ˊᵕˋ)੭ 여-하
3, 4월 공부모임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 이주영 조합원님이 찍은 제주 바다와 오늘의 예수
앨버트 놀런의 『오늘의 예수』입니다.
『오늘의 예수』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가 출간되고 30년 후에 나온 책인데요.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가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되기 이전, 교리와 전례와 도그마로 정의 되기 전 인간 예수 그대로의 모습을 조명하고, 『오늘의 예수』는 예수의 영성과 이 영성이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고유한 영성, 그 영성은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
믿음의 힘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에게서 일어나는 치유를 지켜보면서, 예수는 치유를 믿음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내가 너를 치유했다”거나 “하느님이 너를 치유했다”고 말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한다. 신비한 처방전이나 마법의 지팡이는 없다. 치유는 믿음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에 대한 특별한 자각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알게 된 이들의 삶은 변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이 같은 삶의 차원을 우리가 본받을 수 있을까?
우리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하나의 생물 종으로서도 치유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긴장 이완
침묵명상이 정신과 마음을 이완시켜 준다고 하지만, 이는 우리가 자신의 몸을 이완하려는 행위를 병행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상하는 동안 똑바른 자세로 앉아 얼굴과 굳어진 어때 근육을 풀어주는 일이다. 인격의 변혁은, 우리가 침묵과 고독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고 예수를 따라 사막으로 들어갈 때 시작된다. 이것은 침묵 명상의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고, 성찰하고, 기도하면서 예수의 영이 우리 뼛속 깊숙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일들이 오직 침묵과 고독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사람이나 세상과 교류하여 얻는 통찰 역시도 침묵과 고독이라는 관상의 시간을 거쳐 삶에 통합시켜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간 길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다.
에고
우리 자신과 타인들에 관한 진실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에고’ 이기적 자아다.
자신을 알아가는 평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남들이 내게 적용시킨 이미지도 있다. 여기에는 옳은 이미지도 있고, 거짓 이미지도 있다. 에고의 활동, 곧 자만심과 우월감, 자기비하와 열등감, 독선과 자기연민에 빠지게끔 유혹하는 에고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이 모두가 거짓 이미지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위선적이다. 참 자기가 아니다. 에고가 우리의 참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자기
에고를 소멸하지는 못하더라도, 묶어 두거나 초월하는 것은 가능하다.
- 에고의 모든 간계와 이중성을 온전히 의식한다.
- 에고를 자신에 대한 거짓 이미지, 하나의 환상으로 인식한다.
- 에고와 우리 자신을 떼어 놓는다.
에고 중심에서 물어나 비웃으면서 에고를 객관화시킨다. 일단 자신의 거짓 이미지를 자기 밖에 있는 객체로 여기면,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기를 멈출 수 있다. 여러 영성 전통에서 쓰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거짓 이미지를 바라볼 뿐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 ‘관찰자’가 된다. 거짓 이미지는 내가 아니다. 나는 관찰자이며, 이 관찰자가 나의 ‘참자기’다. 인간의 행위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찰을 심화하려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도 있어야겠지만, 결국 우리는 고요한 시간을 갖는 가운데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기나긴 맹목의 밤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예수가 보았던 것처럼 똑바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됨
구체적인 자각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신비가들이 말하는 ‘하나됨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는 아주 특별하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근원적 자유를 얻었다. 우리도 이 길을 걷고자 노력한다면 얻게 될 것이다.
일치, 합일, 화해, 조화, 평화, 사랑이 아니라 ‘하나됨’이라고 말한다. 일치나 합일의 경우 합일될 필요가 있는 두 개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고 전제한다. 화해는 외면하거나 갈라져 있는 것이 함께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조화와 평화는 불일치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것을 조정할 동안 갈라져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반면, 하나됨은 우리가 이미 하나였고, 언제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하나됨을 의식하거나 깨닫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하나됨을 깨닫기만 하면 자연스레 생긴다.
근원적 자유
예수는 율법들, 특히 안식일 법을 자유롭게 해석했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모든 종교적 관습을 대담하게 무시했다. 예수는 그 어떤 누구의 생각이나 말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인격적 자유를 누렸다. 예수가 가리킨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공동선’으로 번역하는 것이 최선이겠다. ‘공동선’이란 온 인류 가족이나 전체 생명 공동체, 광활하게 펼쳐진 전체 우주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큰 전체의 부분이며, 부분들의 현존 자체를 결정짓는 전체다. 한 부분은 전체의 선을 위해 존재한다. 부분의 정체성은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공동선과 개인의 선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에게 최선이 나에게도 최선이다. 나는 내 이기적 자기중심성만 버리면 되지, 내 선익까지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그건 어차피 내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나를 위한 선이 공동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할 때, 나는 에고에서 벗어나 다른 모든 것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공동선, 다른 말로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유롭게 살고 처신하게 될 것이다.
다함께 '나에게 하느님이란,' '책을 통해 알게 된 예수의 영성' '나의 영성' '우리 공동체의 영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깊고, 오래 울림을 주는 책이었어요.
ଘ(੭*ˊᵕˋ)੭ 여-하
3, 4월 공부모임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 이주영 조합원님이 찍은 제주 바다와 오늘의 예수
앨버트 놀런의 『오늘의 예수』입니다.
『오늘의 예수』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가 출간되고 30년 후에 나온 책인데요.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가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되기 이전, 교리와 전례와 도그마로 정의 되기 전 인간 예수 그대로의 모습을 조명하고, 『오늘의 예수』는 예수의 영성과 이 영성이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힘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에게서 일어나는 치유를 지켜보면서, 예수는 치유를 믿음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내가 너를 치유했다”거나 “하느님이 너를 치유했다”고 말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한다. 신비한 처방전이나 마법의 지팡이는 없다. 치유는 믿음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에 대한 특별한 자각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알게 된 이들의 삶은 변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이 같은 삶의 차원을 우리가 본받을 수 있을까?
우리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하나의 생물 종으로서도 치유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긴장 이완
침묵명상이 정신과 마음을 이완시켜 준다고 하지만, 이는 우리가 자신의 몸을 이완하려는 행위를 병행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상하는 동안 똑바른 자세로 앉아 얼굴과 굳어진 어때 근육을 풀어주는 일이다. 인격의 변혁은, 우리가 침묵과 고독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고 예수를 따라 사막으로 들어갈 때 시작된다. 이것은 침묵 명상의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고, 성찰하고, 기도하면서 예수의 영이 우리 뼛속 깊숙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일들이 오직 침묵과 고독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사람이나 세상과 교류하여 얻는 통찰 역시도 침묵과 고독이라는 관상의 시간을 거쳐 삶에 통합시켜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간 길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다.
에고
우리 자신과 타인들에 관한 진실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에고’ 이기적 자아다.
자신을 알아가는 평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남들이 내게 적용시킨 이미지도 있다. 여기에는 옳은 이미지도 있고, 거짓 이미지도 있다. 에고의 활동, 곧 자만심과 우월감, 자기비하와 열등감, 독선과 자기연민에 빠지게끔 유혹하는 에고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이 모두가 거짓 이미지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위선적이다. 참 자기가 아니다. 에고가 우리의 참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자기
에고를 소멸하지는 못하더라도, 묶어 두거나 초월하는 것은 가능하다.
- 에고의 모든 간계와 이중성을 온전히 의식한다.
- 에고를 자신에 대한 거짓 이미지, 하나의 환상으로 인식한다.
- 에고와 우리 자신을 떼어 놓는다.
에고 중심에서 물어나 비웃으면서 에고를 객관화시킨다. 일단 자신의 거짓 이미지를 자기 밖에 있는 객체로 여기면,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기를 멈출 수 있다. 여러 영성 전통에서 쓰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거짓 이미지를 바라볼 뿐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 ‘관찰자’가 된다. 거짓 이미지는 내가 아니다. 나는 관찰자이며, 이 관찰자가 나의 ‘참자기’다. 인간의 행위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찰을 심화하려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도 있어야겠지만, 결국 우리는 고요한 시간을 갖는 가운데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기나긴 맹목의 밤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예수가 보았던 것처럼 똑바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됨
구체적인 자각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신비가들이 말하는 ‘하나됨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는 아주 특별하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근원적 자유를 얻었다. 우리도 이 길을 걷고자 노력한다면 얻게 될 것이다.
일치, 합일, 화해, 조화, 평화, 사랑이 아니라 ‘하나됨’이라고 말한다. 일치나 합일의 경우 합일될 필요가 있는 두 개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고 전제한다. 화해는 외면하거나 갈라져 있는 것이 함께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조화와 평화는 불일치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것을 조정할 동안 갈라져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반면, 하나됨은 우리가 이미 하나였고, 언제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하나됨을 의식하거나 깨닫기만 하면 된다. 사랑은 하나됨을 깨닫기만 하면 자연스레 생긴다.
근원적 자유
예수는 율법들, 특히 안식일 법을 자유롭게 해석했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모든 종교적 관습을 대담하게 무시했다. 예수는 그 어떤 누구의 생각이나 말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인격적 자유를 누렸다. 예수가 가리킨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공동선’으로 번역하는 것이 최선이겠다. ‘공동선’이란 온 인류 가족이나 전체 생명 공동체, 광활하게 펼쳐진 전체 우주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큰 전체의 부분이며, 부분들의 현존 자체를 결정짓는 전체다. 한 부분은 전체의 선을 위해 존재한다. 부분의 정체성은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공동선과 개인의 선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에게 최선이 나에게도 최선이다. 나는 내 이기적 자기중심성만 버리면 되지, 내 선익까지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그건 어차피 내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나를 위한 선이 공동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할 때, 나는 에고에서 벗어나 다른 모든 것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공동선, 다른 말로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유롭게 살고 처신하게 될 것이다.
다함께 '나에게 하느님이란,' '책을 통해 알게 된 예수의 영성' '나의 영성' '우리 공동체의 영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깊고, 오래 울림을 주는 책이었어요.